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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서쪽에서뜬다면 예상과 다른 캐스팅

by 멀티보스 2025. 5. 12.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예상과는 달랐지만 마음을 울린 캐스팅

90년대 후반 황금기가 시작되던 시절. 그 시절을 함께 살아온 팬으로서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1998)은 단순한 향수 이상의 의미를 가진 작품이다. 이은 감독이 연출하고 임창정과 고소영이 주연한 당시 과장된 멜로드라마와 상업성 짙은 로맨스물 사이에서 조용하지만 신선한 진정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비록 박스오피스를 뒤흔들 만큼 대성공을 거두진 않았지만, 그 시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지금도 여운이 남는 작품이다. 그리고 당시의 시대적 감성을 시각적으로 훌륭히 담아낸 연출력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임창정과 고소영의 조합은 다소 엉뚱해 보일 수 있다. 고소영은 이미 패션계와 방송계에서 ‘90년대의 여신’이라 불릴 만큼 세련되고 우아한 이미지를 구축한 스타였다. 반면, 임창정은 코믹하면서도 서민적인 매력으로 알려진 배우였다. 이 둘이 로맨틱한 주연 커플로 만난다는 건 당시로선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바로 그 점이 이 작품에 진정성을 불어넣었다. 내가 보기에 이 조합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성립시키는 힘이 있었다. 임창정이 연기한 범수는 평범하고 어색한 야구 심판으로, 많은 관객이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멋지거나 유능하지 않지만, 진심과 순수함으로 사랑을 대했다. 고소영 역시 단순한 이상형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녀는 조용한 강인함과 따뜻함을 지닌 인물로서, 범수의 어색한 고백과 감정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두 사람의 케미는 폭발적이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관객은 비현실적인 로맨스가 아니라,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현실적인 사랑을 보았다. 이러한 진짜 같은 감정은 화려하지 않아도 끌어당기는 흥행 요소였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건드린 이야기

말하지 못한 짝사랑의 감정은 시대를 초월한 공감대다. 멀리서 누군가를 바라보며 혼자 애태워본 기억은 누구나 한 번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은 바로 그런 감정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범수는 TV 속에서 현주를 보고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를 스타로 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본다. 그 감정을 수년간 조용히 간직하며 살아간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단순한 서사일 수 있지만, 1998년 당시엔 오히려 신선했다. IMF 여파로 인해 사회 전반에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던 시기, 이 작품은 그런 현실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조용한 위로를 건네주는 따뜻한 이야기였다. 내 경우도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과장되지 않은 감정이 오히려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과한 눈물이 나 충격적인 반전 없이도, 긴 여운을 남기는 사랑 이야기였던 것이다. 관객이 이 영화에 끌렸던 이유는 단순했다. 액션도, 스릴도 아닌 느낌을 위해 극장을 찾았다. 이 영화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었고, 그런 점에서 당시 많은 이들에게 위안이 되었던, 일종의 치유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시대의 감성을 정교하게 담아낸 연출과 미장센

다시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건, 그 시절의 공기와 감정을 얼마나 잘 담아냈는가 하는 점이다. 이은 감독은 과한 스타일링이나 복잡한 카메라 워크에 의존하지 않았다. 대신 따뜻한 색감, 조용한 도심 풍경, 인물의 감정에 집중하는 화면 구성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제목인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은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은유다. 하지만 그 불가능한 감정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려 한다. 그런 절절함은 영상미 곳곳에 배어 있다. 전체적으로 아련하고 서글픈 톤이 있지만, 그것이 절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지나간 시간을 회상할 때 느끼는 그리움에 가깝다. 또한 장르 속 배경은 90년대 서울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텔레비전 스튜디오, 야구 경기장, 거리와 건물들은 모두 꾸며진 세트가 아니라 실제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사실적인 배경은 몰입감을 주었고, 이 사랑 이야기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받아들여지게 했다. 나 역시 그 시절 관객으로서, 이 단순한 관람이 아니라 하나의 추억처럼 각인되었다.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은 대박은 아니었지만, 진심으로 연결된 작품이였다. 나의 관점에서 진정한 매력은 비범함을 평범하게, 또 평범함을 비범하게 만드는 힘에 있다고 본다. 기발한 캐스팅, 감정 중심의 이야기, 섬세한 연출력이 삼박자를 이뤄 관객에게 진짜 같은 사랑 이야기를 전했다. 요즘 로맨스들이 점점 글로벌 포맷에 맞춰 획일화되는 와중에, 이 작품을 다시 꺼내보면 우리가 한때 얼마나 순수하고 감정에 충실한 이야기를 좋아했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과하지 않지만 마음을 흔드는 감성. 소리치지 않지만 조용히 들어오는 진심. 그런 의미에서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은 지금도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떠오르는 서쪽의 해가 아닐까 싶다.